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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스쿨 | 영상) 안나스쿨을 설계해주신 건축가 고 이일훈 선생님이 보내주신 첫번째 편지 :건축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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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프라니 작성일2021-07-31 조회9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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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스쿨을 설계해주신 이일훈 건축가 선생님께서 2021년 7월 3일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안나스쿨의 은인이신 이일훈 선생님의 영혼과 가족분들을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이일훈 선생님의 사위가 쓴 글을 아래에 첨부합니다.  그분에 관한 소개가 잘 되어 있는 글입니다. 



오랫동안 머릿속에서만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했던, 끝끝내 쓰고 싶지 않았던 글을 결국 씁니다. 저의 장인어른이신 건축가 이일훈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대학병원에서 폐암 진단을 받으신 지 70여일 만입니다. 서둘러 시작한 항암치료는 조금도 효과를 보지 못했고 투병하시는 내내 식사도 거의 하지 못하셨습니다. 지켜보는 가족들에게도 참 잔인한 시간이었습니다. 병상의 아버님을 인터뷰해 대표작을 추려 소개하고, 건축세계를 해설하는 책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 생각해서였는데, 결과적으로 꿈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오래 겪지 않으셨으니 오히려 다행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보름여는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이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보내셨습니다. 너무나 갑자기 닥친 이별에 어쩔 줄 모르는 가족들이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남은 힘을 다해 버텨주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어질 뿐입니다.


 아버님은 김수근과 함께 한국 현대건축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김중업 선생의 제자였습니다. 김수근 계열을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 선생과 함께 스승의 뒤를 잇는 ‘맞수’로 종종 비교되기도 합니다. 김중업 선생 타계 후 독립한 아버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30여년 동안 40여개의 작품을 전국 곳곳에 남기셨습니다. 지역성과 공동체성, 생태적 관점을 강조한 사회성 짙은 작품이 많았습니다. 인천 만석동 달동네의 ‘기찻길 옆 공부방’, 충남 홍성 풀무학교의 ‘밝맑도서관’, 경기 가평의 ‘우리 안의 미래 연수원’ 등이 대표적입니다. 생극성당, 면형의 집,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 도피안사 향적당 등 종교 건축도 많이 하셨고, 기업 건물로는 문학과지성사, 세계사, 청년사 등 출판사 사옥을 주로 설계하셨습니다. 주거용 건축은 마포 성미산마을의 공동주택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와 잔서완석루, 궁리채, 탄현재, 퇴계불이 등이 널리 알려졌고 등촌동의 다세대주택 ‘가가불이’로는 서울시 건축상을 받으셨습니다.


 제 생각에 건축가 이일훈의 개성과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는 경기도 화성에 지은 ‘자비의 침묵 수도원’입니다. 학생 수사(修士)들이 생활하는 건물 외벽에 계단을 달았는데 난간이 없습니다. 설계를 맡긴 수사님이 위험하지 않겠냐고 하자 “위험하지만 그리 높지 않아 떨어져도 죽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만약 떨어진다면 정신이 해이한 것이니 수도자로서 자격이 없다. 내쫓아야 한다”고 설명하셨다 합니다. 늘 깨어있으라는 건축적 배려(?)를 그 수사님도 파안대소하며 받아들이셨다 합니다. 폭을 75cm로 좁게 만들어 초기에 불편하다고 원성이 자자했던 복도는 서로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양보해야만 지나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학생 수사들이 나중에 ‘겸손의 복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합니다.


 ‘자비의 침묵 수도원’은 이일훈 건축 철학의 핵심인 ‘채나눔’이 전면적으로 적용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채나눔은 집은 세는 단위인 ‘채’와 나누다는 뜻의 ‘나눔’을 합친 말입니다. 안채, 사랑채, 바깥채 등 여러 건물로 나뉜 우리네 옛집의 공간 구성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습니다. 집을 한 덩어리로 크고 넓게 짓고 모든 공간을 내부화하는 요즘의 건축이 인간의 편리를 위한 것 같지만 실은 건강을 해치고 환경을 망친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설계방법론이 바로 채나눔입니다. 도리어 공간이 좁을수록 집을 여러 채로 나눠 ‘불편하게 살기’ ‘밖에 살기’ ‘늘려 살기’를 실천하자는 겁니다. 침실과 서재를 오갈 때마다 신발을 신고 나와 마당을 가로질러야 한다면 당연히 불편하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지겠지만, 그렇게 ‘의도적이고 권할 만한 불편’을 즐겨야 산들바람도 느끼고 노을도 감상하고 밤하늘의 별도 한번씩 쳐다볼 수 있다는 겁니다. 동선을 줄이는 게 아니라 반대로 늘려야 걷고 움직이며 건강한 삶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공교롭게도 채나눔을 받아들인 집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은 바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 사저입니다. 봉하 사저는 아버님 작품이 아닙니다. 건축가 고 정기용 선생이 설계했습니다. 아버님과 10살 터울인 정기용 선생은 일을 맡으면서 후배의 몫을 빼앗는다는 생각에 많이 미안해하셨다고 합니다. 2년 가까이 노 대통령과 소통하며 설계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정기용 선생이 주기적으로 찾아와 함께 의논했다는 뒷얘기를 아버님이 중환자실에 들어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에서 들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봉하 사저는 채나눔의 기본 개념을 조금 차용한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마저도 전직 대통령쯤 되는 인물이니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지 세상에 큰 돈 들여 자기 집을 지으면서 불편함과 검소함을 기껍게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채나눔은 평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건축계에서 의미있는 반응과 여러 논의를 촉발시켰지만, 건축을 과시와 자본 증식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대중의 통념을 바꾸긴 역부족이었습니다. 상업적 성공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반대였습니다. 출간하지 못한 아버님 마지막 원고엔 이런 문장이 두 번 반복됩니다. “평생 건축하고 살면서 깨달은 것이 있으니, 뜻이 있는 곳에 돈이 없고, 소신이 있으면 외롭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옳다고 생각하신 건축을 고집하신 건 건축이 단순히 집 짓는 기술이 아닌,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신념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버님은 삶의 방식을 의문하고 제안하는 것이 바로 건축가의 일이라 생각하셨고, 평생 한 순간도 그 일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건축가 이일훈은 왕성하게 쓰는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베스트셀러 작가였습니다. 국어교사 송승훈 선생님이 자신이 살 집을 의뢰하면서 건축주와 건축가가 서로 주고받은 A4용지 208쪽 분량, 82통의 편지를 엮은 책 <제가 살고 싶은 집은>은 9쇄를 찍었고 TV 다큐멘터리에서 다룰 정도로 화제가 됐습니다. 공저를 포함해 10여권의 책을 쓰셨고, 신문 칼럼도 오래 쓰셨습니다. 경향신문엔 두 번에 걸쳐 7년이나 칼럼을 연재하셨습니다. 짧은 분량이라도 매일 쓴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한 번도 마감을 어긴 적이 없고 ‘비상사태’를 대비해 항상 너댓개의 예비 원고를 마련해두셨다고 하셔서 늘상 마감을 개판으로 했던 사위는 속으로 퍽 주눅이 들었더랬습니다. 글감은 항상 주변에서 찾으셨습니다. 외출하실 땐 습관처럼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며 눈에 띄는 걸 찍고 메모하고 생각을 정리해 작더라도 결과물로 만들어내셨습니다. 암 선고를 받고 병원에 계실 때도 계속 쓰셨습니다. 하루 세끼 나오는 식사를 항암제 부작용으로 한 술도 뜨지 못했으면서, 매번 수저가 담긴 종이봉투만은 곱게 펼쳐 따로 모아 그 여백에 빼곡히 쓰셨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보호자 면회도 없이 격리된 병실에서 무료함과 쓸쓸함과 엄습하는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낼 유일한 방편 또한 글쓰기 외엔 없었을 거라 짐작합니다. 나중에 영인본을 만들려고 잘 모아뒀다며 수저봉투 수십장을 가지런히 묶은 두툼한 뭉치를 꺼내 보여주시는데 쏟아지는 눈물을 참기 힘들었습니다.


 아버님을 처음 만나뵈었을 때를 다시 떠올립니다. 목동의 한 일식집에 마주 앉아 인사를 드리자마자 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열댓잔 건네셔서 대낮부터 불콰해졌습니다. 당신께서 결혼 승락을 받으러 가셨을 때도 장인어른이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술만 따라주셨다면서 웃으며 거푸 잔을 건네셨습니다. 정말 끝까지 아무 것도 묻지 않으셔서 기분이 좋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습니다. 주례가 없었던 결혼식에서 직접 축사를 하시면서는 “부부가 싸우지 않고 살 도리는 없으니 잘 싸우는 방법을 터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당신과 술친구가 되어달라며 대리운전비는 평생 지급하겠노라고 약조하셨습니다. 하객들이 다 빵 터졌는데 결과적으로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곧 아이가 태어났고, 어린애를 뒤에 태운 채 취해서 남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매번 장인과 저는 맥주 한두 모금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1년 365일 중 360일은 술을 마시는, 그렇게 사람 좋아하고 수다 떨기 좋아하는 천하의 술꾼 둘이 장인과 사위로 만나서 정작 둘이 질펀하게 한 잔 마셔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헤어지게 됐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럴 줄 알았더라면 하면서 임종 때 엉엉 울었습니다. 너무 애통해서 그동안 마신 술이 다 눈으로 쏟아져나오는 것 같습니다.


 앞서 언급한 수저봉투에 적은 아버님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수상을 축하하며 시작한 글은 그렇다고 언론과 대중이 너무 아부 일변도 아니냐 그이의 연기에 대한 진지한 분석이 부족한 것 아니냐 딴지를 걸다가 다시 조영남의 한심한 여성관과 인성을 한참 꾸짖다가 종내 다른 이야기로 빠지고 마는데, 그러니까 본론은 장례식장에 울려퍼질 노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보통 유명가수들이 죽으면 장례식장에서 그의 대표곡을 부르기 마련인데, 조영남은 ‘화개장터’가 아니라 다른 노래를 불러달라고 말하고 다닌다는 겁니다. 소설가 이제하 선생이 작사 작곡한 그 노래의 원제는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인데, 아버님은 조영남의 여성관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죽으면 불러달라는 그 노래의 안목에는 그만 탄식하고 마셨답니다. 이 노래를 빈소에서 틀어드려야 할까 봅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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