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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 기억에 관한 성주간을 맞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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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프라니 작성일2018-04-04 조회4,77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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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간은 기억에 관한 주간이라 생각된다.
예수님은 참 기가막히게 아이디어가 좋으셨다.
돌아가시기 전 같은 예식을 행하라고 유언을 남기심으로써
우리는 매일 매일, 매년 매년 전례를 거행하며 그분을 기억한다. 
성주간에는 더더욱 그분이 지상에서 계실때의 마지막 순간들에 관해 기억하고 기념한다.

해마다 그렇듯 성지가지를 흔들며 행렬를 하기 위해 준비를 해야 했다.
한국은 편백나무 가지를 자르지만
이 곳은 트나웃 나무(설탕나무) 혹은 코코넛 나뭇잎을 잘라
다양한 모양으로 접어서 축성받을 성지가지를 만든다.
손으로 뭘 만드는데 재주가 없는 나는
매년 그걸 보면서도 여전히 접을 줄 몰라 아예 포기하고 구경만 한다.
우리 교사들도, 아이들도 기억을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마리도미니까 수녀님은 잘 기억하시고 아이들에게 가르치신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저마다의 솜씨를 발휘해 정성껏 접는 아이들이 예뻤다.
다 준비한 후 사목회장님이 나무 위 코코넛을 여러개 따서 먹으라고 주셨다.
   
그리고 성가 연습에 들어갔다. 성주간은 전례가 복잡하다.
우리 아이들이 와서 도와주지 않으면 성가가 이어질 수 없다.
그래서 목요일부터 부활절까지 미사에 꼭 참석해달라고 신신당부하며 노래를 가르쳤다.
이 나라 성가책은 악보가 없고 가사만 있다.
아이들도 학교에서 음악을 배우지 않는다.
악보란 것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는 쉽지 않다.
대신 아이들은 청력이 발달해있다.
한국 아이들보다 더 잘 하는 듯 하다.
악보는 없으나 귀로 몇 번 들으면 가사만 봐도 음을 외워 부를 줄 안다. 신기하다.
   
성가연습을 어느 정도 마친 후
성주간에 들어가기 전 아이들의 기억을 일깨워야겠다 싶어 열심히 설명을 시작했다. 

<얘들아! 우리 작년에 직접만든 트나웃 나뭇가지 흔들며 공부방 앞에서부터 성당까지 “쩨이요~”노래 부르며 행렬해서 갔던거 기억하니?. 복음 읽을 때도  연극처럼 대사를 주고 받으며 읽다가 군중 부분에서는 다같이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아라고 외쳤던거 그거 기억해? 또 목요일엔 성모상 앞 작은 연못에 바가지를 마련해서 서로 물을 부어주며 발을 씻어주었잖아. 그 때 우리가 빵과 포도주스를 준비해서 최후의 만찬 예식처럼 미사 마칠 무렵 서로 맛있게 나눠먹었는데... 그거 기억할 수 있겠어?... >

등등 설명을 하는데 내 말이 다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15살 마리마가 불쑥 확신에 차서 말했다.

<벙쓰라이 ~ 난 벙쓰라이가 무슨 말하는지 다 기억해요. 내가 비록 신자는 아니지만 4년째 전례에 참석했으니 난 성가도 다 알고 예식도 어떻게 진행하는지 잘 알 것 같아요. 그러니 우리 올해도 함께 잘 할 수 있을거에요. 걱정마세요. 하하. 난 이렇게 똑똑하고 기특한 소녀라는걸 벙쓰라이가 알아주면 좋겠어요!>

아주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마리마가 사랑스러워서 좀 웃으며 한껏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신망고와 옥수수를 준비해서 간식으로 먹는 도중 마리마가 방귀를 뀌는 바람에 모두가 자지러지게 웃었고 그에 이어 또 다른 방귀 이야기 등 지저분한 이야기들이 줄지어 나왔다. 아무리 자제시키려 해도 되질 않았다.
   
그러면서 문득 마음이 뭉클해졌다.
우리가 함께 해온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고스란히 살아있음을 느꼈다.
해가 바뀌고 아이들은 자라고 나도 변해가지만
어떤 무언가를 기억하고 같은 예식을 행했던 기억이 우리 안에 남아있는 것.
그것은 인생에 의미를 더해주는 것이다.
꼭 예식이 아니더라도 매일 매일 그냥 우리가 함께 웃고 하는 지극히 평범한 날들이
아이들의 기억 창고 속에 차곡차곡 쌓일텐데...
그것은 후에 돌아보면 어떤 모습, 어떤 느낌과 함께 어떤 의미가 되어줄 것인가.
언젠가는 우리 아이들이 이 곳을 떠나 또 다른 삶의 자리로 떠나가야 할 때가 올 때,
언젠가는 현실이 힘들어 고통으로 쓰러지는 순간이 올 때.
그 때도 잘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 시절 자신을 좋아해주고 아껴주던 친구들이 있었다고.
편안한 언니, 누나처럼 대해주는 공부방 선생님이 있었다고.
비록 잔소리는 많았지만 사랑을 쏟아주려고 애썼던 벙쓰라이도 있었다고.
그리고 우리 함께 하느님께, 부처님께 서로를 위해 기도도 드리며 축복을 빌어주었었다고.
그런 사랑의 날들에 대한 기억으로 힘을 길어올릴 수 있기를.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기억 보존을 소망하며 성주간을 맞이한다.

2018. 성지주일 

댓글목록

단비님의 댓글

단비 작성일

  + 수녀님, 성주간의 아름다운 전례와 함께하는 모습이 아름답네요.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주님안에서 힘 얻어  복음을 전하는 발이  늘 기쁘고 가볍게 달릴수 있기를 기도드려요. 건강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