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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 캄보디아의작은행복(2)- 처음 왔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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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프라니 작성일2011-02-19 조회3,6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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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8일 캄보디아에 처음 왔을 때

날씨가 무척 더웠다.

건기에 속하는 3-5월은 가장 더운 때여서

기상청 보고 날씨는 40도였지만

밧덤벙의 체감온도는 45도 정도 된다고 말들을 했다.

선교사들도 자신들도 이 곳에 온 이래 최고로 덥다고 그랬다.

지구 온난화 현상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떤 캄보디아인은 우리에게

왜 하필 제일 더운 시기에 왔느냐고 묻기도 했다.

특히 오후가 되면 머리가 멍해지면서 그저 덥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앉아 있는 것도, 누워 있는 것도 하도 더워서 편하지가 않았다.

선풍기에서는 더운 바람이 나오고 수돗물은 뜨겁고

게다가 전기가 자주 나가서 선풍기도 틀지 못할 때는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찜통안에 사는 기분이었다.

날씨라는 것이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굉장히 파워풀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오자마자 제일 힘든 이유가 날씨일 수 있겠는가 싶지만

더위는 모든 것을 힘빠지게 하고 축 늘어지게 했다.

더운 나라 사람들이 왜 가난한지, 왜 의욕을 잃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우리가 자연을 존중하지 못한 결과로,

열대 지방 사람들은 더더욱 고생하는 것이었다.

필리핀에서와 마찬가지로 4계절을 누리고 살아온 감사를 깨달았다.

어느날 나는 지구촌 모든 사람들은 열대지방 사람들에게 감사해야겠다고,

그들이 그 자리에서 무더위를 견디며 살아주고 있어서

우리는 지구 다른 쪽에서 4계절의 묘미를 맛보며 살아왔다고 느꼈다.

그들은 언제나 뜨거운 태양에 노출되어 살고 있어

피부도 까맣게 되는데서 오는 열등의식과

몸도 한평생을 더위에 찌들어 지내느라

쭈글쭈글 금방 늙고 죽는 한계를 받아들이며 살아왔으니 말이다.

날씨 때문에, 그 깟 열악한 환경 때문에

내가 힘과 의욕을 잃는다는게 한심하고 허무했지만

온 세상을 태울 듯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은

내게 '그깟'이 아니라

내가 오늘 하루 살 만할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해주곤 했다.

매일 늦은밤부터 이른 아침까지는 물이 안나오는데

가끔은 한 낮에도 물이 안 나왔다.

그럴 때는 낑낑거리며 큰 빗물통속의 빗물을 받아와서

설거지하고 몸을 씻었다.

처음 섭리회 수녀원에서 식사하는데 대부분의 식기류가 알루미늄이었다.

알루미늄 스푼을 손에 들면서

지극히 작은 가난을 대하는데도 어색함을 느꼈다.

아스팔트가 깔려 있지 않은 길을 걷기 시작하면

이내 흙먼지 투성이가 되었다.

주로 트럭 뒤 짐칸에 타고 다녔는데

뜨거운 태양과 먼지바람 속을 몇 시간 달려 행사장에라도 다녀오면

오가는 길에서 소모하는 에너지가 너무 커서 다음 외출이 두려워졌다.

시장에서 제법 큰 문구점엘 가도 내가 찾는 문구류가 없을 때,

오토바이 뒤에 타고 시장에 가서 빨래 삶는 솥을 머리에 이고

다시 자전거와 오토바이들로 교통혼잡한 길을

오토바이에 의지에 돌아올 때,

나는

이것이야말로 한 번 살아볼만한 새롭고 소박한 삶이 아닌가?

오토바이를 다 타보다니 얼마나 스릴있고 재미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너무 서글프기 짝이 없고

이런 여건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앞이 캄캄해지기도 했다.

그럼 또 내 안에서 선교사가 이런 고생도 각오하지 않았냐고

마음을 강하게 먹어라고 하는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네 주제에 무슨 선교사가 될 수 있겠느냐고 비웃는 소리가

내 안에서 올라와 나를 힘빠지게 했다.

그렇게 집에서나 밖에서나 땀을 뻘뻘 비오듯 흘리며 살아 있었다.

어떻게 하루 하루가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가고 있다는 것, 내가 살아남고 있다는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4월 중순을 넘어가면서 갑자기 비가 쫘악 올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 살만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열악함' 같은 것은 시간이 흐르고 익숙해지면 또 그런대로 살만할테고

날씨만 이만하면 살만할텐데...정말 이만만 하면.' 라고 생각했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정말 하느님이 축 늘어져있는 내가 불쌍해서

나를 달래시느라 그러신 것 같다는 느낌도 들기도 해

기분이 괜찮아지곤 했다.

그런 나를 보며 어느날 요나가 떠올랐다.

예전에 구약의 요나를 보면 변덕스러운 그 성질이 참 이상했는데

내가 완전 그 꼴로 하느님을 대하고 사는 것이었다.

쫌 미안했다.

네 사랑이 요것밖에 안되냐고 따지시지도 않는데

내 스스로가 요것밖에 안되는구나 하며 한숨이 나왔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다가 내 마음이 변화되는 계기가 있었다.

교구청 안에 학생 기숙사가 있는데

어느날 그곳에서 영화상영을 한다고 해서 용기를 내어 혼자 가 보았다.

청소년들과 함께 를 봤는데

잔잔한 음악과 아이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어우려져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영화 보는 동안 그 친구들이 내게 부채를 부쳐 주었는데

영화내용보다 그것이 내겐 훨씬 감동적이었다.

그 중 한 청소년 친구는

영화가 끝난 후

수녀원까지 함께 걸어가 주었는데

'굿모닝', '굿나잇'을 캄보디아어로 가르쳐주었다.

그 때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 날 나는

만일 내가 이 청소년들과 사귀고 친해지고 사랑한다면

만일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마음을 쏟을 수 있게 되면

날씨가 덥던지 말던지, 환경이 열악하던지 그렇지 않던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서라도 빨리 크마에를 해야겠다고

크게 마음먹었고 공부하려고 애를 썼다.

그 후로 나는 오후가 되면 집 밖으로 나가

장애인들과, 아이들과, 청소년들 곁에 가서 앉았다.

내 차림새는 모기에 물리지 않기 위해

몸빼 바지에 양말에 얼굴은 끄로마(긴 천)으로 꽁꽁 싸맨

영락없는 맛이 간 아지매지만

그들은 나를 환영해주고 그저 가르쳐주려하고

나보다 더 내 '말 못함'을 답답해했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보니 그들의 얼굴이 정말 환했다.

수녀원 맞은편 장애인 센터에 사는 이들은 신나게 휠체어를 운전해서

날아다니다시피 했다.

팔없는 사람들도 요리를 하고

다리가 없어도 다른 이에게 격려와 용기를 줄 줄 알았다.

신기했다. 모두들 열려 있었다.

내게 먼저 인사하고 수줍어했다.

그 때 나는 사람들의 존재가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다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사람들 곁에서

내가 살아숨쉬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란 인간을 이 '희망의 땅'으로 보내신 분의 마음을

다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뜻'이 있어 그리 하신 것이었으면 좋겠다.

살아가면서 괜찮은 '선교사'가 되어져갔으면 좋겠다.

가난도 받아들이고, 뜨거운 햇빛도 받아들이면서

체면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렇게 살아갔으면 하는 것이

나의 제일 큰 소망이다.

이 소망이 그분께서 먼저 내게 품으신 소망이었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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